
초등학교 2학년 때 사귄 친구 패거리들 중 하나가 자기 가족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 이래, 제 삶에서 중국은 언제나 호기심이 동하는, 제법 먼 타자의 위치를 점해왔습니다. 소싯적 아버지는 항상 중국인을 “중국인”이 아니라 “짱*“라는 말로 부르셨고 (물론 “일본인”도 언제나 “쪽**“라고 하셨으니 과연 훌륭한 내적 일관성이라 하겠습니다) 그 뜻도 제대로 몰랐던 저는 제가 장성하고 나면 그런 수수께끼같은 단어들이 어르신들의 옛 말씨로만 남을 것이라고 짐작했었습니다. 정말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 또래의 반중 감정 또한 그러한 알쏭달쏭함을 더욱 부채질했고 그래서 더더욱 여러 경로로 그런 호기심을 해결해 줄 것들을 찾아보고는 했습니다. 중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페어뱅크의 《신중국사》와 이매뉴얼 쉬의 《근현대중국사》를 통독하거나, 만청의 음악을 가사까지 꼭꼭 씹어가며 듣거나 하는 것들이랬지요. (연이 없어서 직접 가보지는 못했네요) 이런 것들은 아주 어린 시절에 “아라시(嵐)“와 “포켓몬스터”로 시작해 제 취미를 가득 채웠던 일본의 자리를 요즘에 들어서야 조금씩 밀어내고 한 켠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바로 이 《만장적계절》(漫长的季节, 2023)이라는 드라마입니다.
《기나긴 계절》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만장적계절》은 1990년대 말 중국 동북지방의, 화린이라는 철강도시에서 일어난 토막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첫 화는 201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요, 택시 기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모는 초록색 폭스바겐 차량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옛날에 ’인민공화국’이 처음 서구 자본에 열렸을 적에, 독일 폭스바겐이 중국 기업과 세운 합작회사가 출시한 자동차라고 하네요. 한때 중국의 국민차였다고 하니 주인공 왕샹 영감님은 국민 택시기사쯤 되겠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택시 한 대를 교대로 몰던 사촌 처남 궁뱌오는 어디서 돈이 났는지 새 택시를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번호판이 가짜네요. 한술 더 떠 그 택시가 뺑소니 사고를 내었던 바람에 모처럼 새로 산 택시를 몰지도 못한 궁뱌오는 왕샹과 함께 뺑소니 사건의 뒤를 밟습니다. 범인을 코앞에서 놓치는 찰나, 왕샹은 그 범인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낍니다. 20여년 전 아들을 죽게 만든 그 토막살인사건이 떠오른 것이지요.
영화 내내 중국 동북지방의 가을이 지나치게 밝고 따뜻하게 그려집니다. 동북은 북한만치로 추운 고장일텐데요! 이 기이하게 따뜻한 색감은 낡은 철길이 가로놓인 옥수수밭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뺑소니 범인이 모습을 감춘 그 옥수수밭의 샛노랗고 따뜻한 풍경을 보면 초등학생 시절 고향집 앞에 펼쳐져 있던 황금빛 논이 생각나더라고요. 궁뱌오가 비둘기들을 키우며 사는 단지 최상층도 그런 가을 늦은시간의 햇빛이 내려쬐는 장면으로 자주 비칩니다. 영상에 다채로운 색상이 담기는 일이 많은데 (택시는 초록색이고, 왕샹은 빨간 스웨터를 자주 입고 나타나며, 회차가 진행될수록 유난히 까만 옷을 입고 다니는 싱젠춘, 청자켓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왕양같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노란 가을빛에 물든 화면이 이런 색상들을 다잡아주면서 이 드라마가 살인 미스터리라는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1990년대에 중국은 큰 경제적 전환을 맞습니다. 이미 70~80년대에 개혁개방을 한 중국이지만, 1991년 소련 붕괴부터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까지를 거치며 사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화린시는 그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1997년의 화린은 영원히 거기 서 있을 것 같았던 거대한 국유 철강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집산 체제를 해체하는 자본주의 물결은 또 한편으로 도시로 또 대학가로 흘러들어오는데요, 그것을 이야기 속 인물들과 그들이 겪는 사건들로 고스란히 길어올리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걸 유난히 좋아하나봅니다)
드라마를 끝까지 보았을 때 이야기의 소재 자체는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에 묻힌 미해결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피해자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많이 본 것 같고, 1990년대 말 중국의 살인사건 수사 장면들은 (그보다는 앞선 시기 한국이 배경인)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슬프고 화가 나는 사연들이나 가슴아픈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것들 자체보다는 드라마가 그것을 그리는 방식, 따뜻하지만 거리가 있고 들여다보되 훔쳐보지 않게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앞서 적었지만, 그런 사건들이 1990년대와 2010년대 중국 동북이라는 배경을 통해 드러나면서 취하게 되는 묘사들이 이방인으로서 시선을 끄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밖에 재미있는 것들을 적자면… 사운드트랙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락킹한 트랙이 많은데, 만청때문인지는 몰라도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 속에 피아노 연주도 제법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길게 뽑히지는 않습니다) 드라마에서 “꿈”이라는 단어가 무게를 가지고 등장하는 걸 생각하면 쇼팽의 녹턴이 아무래도 인상적일 수밖에 없겠네요. 드라마에서 음식도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유탸오(중국 남부식 꽈배기…?)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고, 꿔바로우는 한국에서도 원체 익숙한 요리라 반가웠습니다. 이 음식들이 하나같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들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주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계란을 태워먹는다거나, 만두를 먹지 못한다거나, 소금을 두 번 친다거나 하는 것들이 전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비디오방이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트위터의 어느 분이 여기서 한국 영화 “초록물고기”의 포스터를 발견하셨더라고요. 비디오방을 운영하는 인물들과도 연이 있어보인다는 생각을 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저는 오락실 장면에서 잠깐 나오는 “킹 오브 파이터즈”가 반가웠습니다. (중국에서 인기가 많았더라지요?)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만장적계절》이 중국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쉽게 수긍이 되었습니다. 혹은 현대 중국이 너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반문을 하시지만, 저는 그 메시지보다 그것이 어떤 손에 담겨 나오는지를 보면 그래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국에서도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드라마였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티빙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