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게임 "어게인스트 더 스톰"의 플레이 화면, 플레이어가 비오는 정착지를 조망하고 있다

집에 와 보니 2026년 지방선거 공보물이 와 있었습니다.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와 달리 지역의 현안이 주로 대두되고, 그래서 가치나 상징의 언어가 직접 공방을 이루기보다는 이해의 대립이나 경제적 효용의 문제에서 이러한 가치들이 어떻게 실체화되는지를 많이 보게 됩니다. 기초의회 의원 후보 공보물에 적힌 요 앞 하천의 정비, 공원의 운동기구 설치같은 작지만 반가운 공약들부터 거대한 예산이 오가는 기반시설과 민간 투자 유치까지 전부 그러한 것들입니다. 예산, 노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이러한 입장의 대립은 언제나 우선순위의 재조정을 불러옵니다. 문득 《어게인스트 더 스톰》 속 종족들의 이해 사이를 오가며 정착지를 건설하는 과정이, 정치를 소재로 한 어떤 게임들보다도 더욱 그러한 이해조정의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도시 건설 게임은 처음 시작하고 한 시간이 가장 재미있다’(《폴리곤》의 이 영상을 보고 호기심이 동했었지요)에서 착안한 도시 건설 로그라이크 게임 《어게인스트 더 스톰》은 플레이어가 여왕의 총독이 되어 매 주기마다 몰아치는 기묘한 폭풍 속에서 새로운 개척지를 하나씩 건설해나가는 게임입니다. 개발의 대상이 되는 숲의 적의로 인해 개발지는 영구적으로 개발된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목표를 달성하면 다음 폭풍까지만 유지되는 기점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처음 정착지에 도착하면 다양한 종족들 내에서 임의로 선택된 세 개의 종족, 채 10명이 되지 않는 정착민들로 건설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종족들은 서로 다른 형태의 주거지를 선호하고, 다른 능력에 서로 다른 직군을 선호하고, 또 식문화와 여가까지 서로 다른 것을 선호합니다. 그냥 기분만 나쁘다면 모르겠지만 이들의 사기를 나타내는 “결의”는 정착지에 주기적으로 폭풍기가 찾아오면 눈에 띄게 감소해서 결국 이들을 정착지에서 이탈하도록 만들고, 이들이 정착지에서 이탈하거나 각종 사고로 사망하면(숲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총독이 여왕의 분노를 사 정착지를 다 건설하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소환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사기를 증진시키는 일은 이 로그라이크 도시건설 게임에서 게임 오버를 막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또 매우 높은 결의 수치는 그 자체로 승리에 필요한 명성 점수를 벌어주기도 합니다)

각 정착지는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고, 보유한 자원도 각기 다르며, 플레이어가 건설할 수 있는 시설들도 매 플레이마다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에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정착지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종족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상황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결국 이들이 공통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여분의 자원을 어느 종족의 복리에 투자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잃게 되어도 입게 되는 타격이 가장 적을 종족은 어디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게임은 이해의 조정이라는 정치보다도, 그 정치의 실행이라는 의미에서의 행정, 혹은 (이들이 플레이어의 행동을 투표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니) 통치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키아벨리적 게임이라는 걸까요?) 총독이라는 직책 이름이 그럴싸해지는 순간입니다.

정치의 여러 측면을 소재로 활용한 게임들이 많습니다. 민주주의 선거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데모크라시》 시리즈와 같은 게임도 있고, 《수저린》처럼 정치권력 내의 암투와 19세기 유럽을 연상케하는 외교 담판을 소재로 만든 게임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어게인스트 더 스톰》에서 그 정치의 가장 고전적인 정의를 보게 됩니다. 제가 《트로피코》 시리즈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플레이어가 독재자가 되는 것이 《트로피코》 시리즈의 정체성이지만, 기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충돌하는 여러 세력들 중 무엇을 포용하고 배제할지 결정하고, 한정된 자원으로 체제 내의 세력들 간 중간점을 찾아가는 것이 꼭 현실 정치의 어떤 점들을 재밌게도 빼닳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플레이어의 뒷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드는 일까지도 《트로피코》겠지만요!)

호평에 혹해서 구매한 게임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게임이 반복적이라고 느껴지는 타이밍이 조금 이르고, 이를 해소할 수 있을만한 ‘영구사망 바깥의 업그레이드’가 특히 덜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서 조금 따분하고 어느 정도는 저렴한 느낌마저 나는 스토리도 많이 아쉬웠습니다. 게임의 난이도를 높일수록 도시 건설 장르 특유의 많은 정보량에서 오는 골치아픔이 로그라이크 요소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몹시 피곤해지는데, 스토리를 약간 더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이 로그라이크 루프에서의 피곤함을 많이 달래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나의 정착지를 플레이하는 데에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이들 정착지를 여러 군데 만들어나가며 특정 재화를 얻는 큰 플레이스루를 성공시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흐름은 일반적인 로그라이크 장르의 게임들보다 훨씬 길다보니 그 점에서 오는 피로도 많은 것 같네요. 그래도 간단하게 가끔씩 즐길 수 있는 일일 챌린지 같은 것이 위안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