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 묘사된 경사를 타고 내려오는 "할로우 나이트: 실크송"의 주인공 호넷의 모습이 담긴 게임 스크린샷

저는 하이프(hype)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편입니다. 《할로우 나이트》를 처음 플레이했던 것도 2020년이었으니(후속작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좀 지났을 때였는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플레이했었지요) 말입니다. 그래서 《할로우 나이트: 실크송》(이하 《실크송》)이 (안) 나온다는 소식에도 통 시큰둥해 있었지요.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이전에 공개된 영상에서 보이는 게임의 여러 요소들이 저로 하여금 ‘아 후속작은 메트로배니아 플래포머라기보다는 액션 RPG 요소가 많은가보다’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지요. 액션 RPG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장르가 달라지면 전작으로부터 오는 기대도 어느 정도는 조정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게다가 저는 전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심 《실크송》이 그 정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기대감을 어느 정도 낮추어 놓는 것이 실제로 《실크송》을 만났을 때 나름대로 기쁨을 얻는 방법이라고 여겼지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얹자면… 지금의 저는 《할로우 나이트》를 즐기던 때보다 5년 더 늙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지요 :( 손가락도, 취미에 대한 열정도 빠릿빠릿하지 못합니다 - 머릿속에서 견훤의 “자네도 이제 늙었어!”하는 호통이 울리는 듯하네요)

그런데 아뿔사, 막상 《실크송》이 스팀에 출시되지마자 저는 어느새 대뜸 결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임을 발매일에 사는 실수(?)는 옛날에 “파이어 엠블렘 if”에서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저는 졸지에 출시일부터 따끈따끈한 게임을 받아서 (물론 스팀 서버가 터지는 바람에 실제 구매는 새벽에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로 팔룸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답니다.

9월 한 달 내내 《실크송》의 세계에 빠져 지냈고, 10월에는 게임에 숨겨진 마지막 이야기들까지 진행했었지요. 그동안 게임 팬덤은 한번 뜨겁게 끓어올랐습니다. 정말 멋지고 잘 짜여진 세계였지만 또 너무 어렵다는 말들도 많았습니다. 저도 플레이 5~10시간 정도의 구간에서는 너무 힘들어서 패드를 집을 용기가 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소울라이크로서의 《실크송》이 메트로배니아로서의 《실크송》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구간을 지워나가고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곳이 길이기를 바라면서 우격다짐으로 2장까지 헤쳐나가니 그때부터는 정말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게임이 되었습니다.

개발사가 전작에서 가장 창발적으로 플레이한 유저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작에 비해서 죽음의 비용이 비교적 값싸게 되었다는 점이 있는데 (초반부터 죽어도 게임 속 화폐를 잃지 않도록 처리할 수 있고, 자신의 죽음을 회수하는 것이 간편하고 또 편의적으로 이용하기 쉽도록 바뀌었습니다) 전작에서 일부러 죽어서 자신의 그림자를 유용하게 써먹는 플레이어들의 영상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저도 언제부터인가 너무 힘든 교전 시퀀스에서는 고치를 포션처럼 쓰고 있더라고요.

가장 크게 감탄한 것은 호넷의 무브셋이었습니다. 게임 시작부터 ‘대각선 하단치기’와 ‘난간 짚고 점프’라는 충격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데요, 이런 무브셋 하나하나에 플레이어가 적응하면 적응할수록 정직하게 유려해지고 강해지는 호넷이 이 게임의 매력이자 진입장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톱 실’에 이르면 하단치기와의 조합으로 그야말로 활강 액션 게임이 됩니다. 움직임의 특성을 빠르게 눈치채고 익숙해지면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달까요!

눈치, 아마 이 게임의 게임플레이를 한 가지 단어로 정리하면 눈치가 될 것 같습니다. 호넷이 어떤 움직임을 하고, 어떤 조작을 하면 비슷하지만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지 깨닫는 눈치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숙련”의 영역 중 하나입니다. 그뿐인가요, 게임의 적들은 강하고 어떤 때에는 짜증나기까지하지만, 전작 이상으로 사전 동작을 다양하게, 많이 취하기 때문에 이걸 파악하고 대처하는 눈치가 게임의 난도를 크게 좌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채 꼭대기 복도에서 거대한 첼로를 들고 활을 휘두르는 적들이 유독 대시 공격에 약하다는 걸 깨닫고 대시 공격으로 골탕먹여줄 때의 즐거움, 그런 것이 이 게임을 즐겁게 만드는 또다른 ‘탐사’의 경험이었습니다.

제 맘속에서 《할로우 나이트》는 각별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에 꽉 막혀있던 시절의 성탄을 즐겁게 만들어 준 게임이기도 하고, 아주 예전에 《동굴 이야기”를 플레이했을 때보다도 (사실 《동굴 이야기》는 많이 선형적이기도 하지요) 더더욱 이곳저곳을 헤매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게임이지요. 《실크송》은 전작 《할로우 나이트》에 비해서 그런 헤매는 즐거움은 비교적 적어진 게임입니다. 주 이야기로 뻗어나가는 큰 줄기를 팀 체리가 잘 정돈한 느낌이 있습니다. 전작은 산만하고 정돈되지 않은 길을 제가 뒤적이고 다니는 재미가 각별했는데, 그 점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네요. 대신 호넷의 움직임과 여러 도구들은 전작과 완전히 다르고, 또 많은 부분에서 게임의 진화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게임 엔딩을 5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스피드 러너” 도전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면서 그 점을 더욱 크게 느꼈습니다. 원체 어려운 게임이고 제 손도 그렇게 빠르지 않아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새 게임을 시작했는데, 호넷의 움직임에 익숙해져서 첫 플레이에서는 마냥 어렵게 느껴졌던 구간과 보스들을 의외로 손쉽게 상대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게 됩니다.

게임의 난이도 수준 때문에 전작을 반드시 플레이하고 오라는 (단순 비교를 하면 전작보다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이야기들이 많은데, 사실 제게는 두 게임의 ‘어려운’ 지점이 많이 다르게 느껴지다보니 전작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 게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려 《할로우 나이트》를 플레이한 직후에 《실크송》을 플레이하면 (혹은 거꾸로 《실크송》 이후에 다시 《할로우 나이트》를 플레이하면) 오히려 적응이 어려울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물론 게임 난도때문이 아니라, 게임의 이야기 때문에라도 전작을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특히 3장 너머로 숨겨진 게임의 이야기는 전작을 해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 측면에서도 《실크송》에서 많은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성별 있는 아이’(gendered child)라는 호넷의 캐릭터가 게임에서 혈연을 초월한 자매애와 연대로 이어지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마 호넷이라는 캐릭터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호넷의 성우 분이 많이 참여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네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 타인이 지우는 욕망을 자신의 자산으로 이용하는 호넷의 캐릭터는 특히 게임 속 어느 문장과 관련된 이벤트에서 가장 빛났던 것 같습니다. 여느 인간들의 이야기보다도 더 멋진 여성 서사를 지닌 “벌레 이야기”임에는 이견이 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역시 저는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플릭 영감에게 ‘최고의 NPC 상’을 드리고 싶습니다 - 게임 후반에 다시 만났을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