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특히 근현대) 건축을 잘 모릅니다.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건축물이라고 하면 서울 강남에 있는 구멍 송송 뚫린 빌딩이나 강북 적당히 높은 곳에 오르면 어김없이 저 빌딩숲 너머로 보이는 사우론의 탑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다큐멘터리에서 만나는 세계의 유명한 건축물들이야 들어서 알지만은, 그걸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해서 머리에 집어넣을 기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야 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즐거움을 누려보자는 마음으로 건축에 관한 교과서격인 책들을 잠시 찾아보았습니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책으로는 케네스 프램튼의 두 권짜리 《현대 건축: 비판적 역사》가 있던데, 이걸 좀 읽다보니 (물론 유익했지만) 머리가 아파오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쉬운 책으로 골라본 것이 이 《건축의 사회사》입니다.
《건축의 사회사》를 처음 펼치면 단박에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림이 많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책이 저자가 직접 그린 도해들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건물은 물론이고 인테리어 소품이나 인물 그림까지 빼곡한 게 얼핏 그림책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알아가기 어려운 주제임에도 책이 쉽게 느껴집니다. 꼭 그림만이 아니더라도, 저자가 서술을 건축 그 자체의 역사 대신 건축이 어떻게 당대 유럽 역사와 연관지어 변화해나갔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도 읽어나가기 평이하다는 느낌을 만듭니다. 한국어판 제목처럼 과연 건축의 사회사적 서술이라 부를 만합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채택한 것은 저자의 사상적 기반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이 영국인 저자의 생각지도 못한 빨간맛(?)에 저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특히 영국 산업시대의 로버트 오언과 윌리엄 모리스부터, 소련 구성주의의 모이세이 긴즈부르크까지 이 책 내내 건축과 당대 진보적 사상과의 연계를 거듭하여 밝혀내는 저자의 투철함이 돋보입니다. 건축을 사회 개조와 진보의 수단으로 여겼던, 건축 그 자체를 위한 건축을 주창한 건축가들에 대한 명확한 반대도 역사가에게서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질리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기에 읽는 사람의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판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사조라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저자의 입장이 확고한 이상 그 서술을 어느 정도는 감안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책 자체가 방대한 주제를 빠르게 훑는 감이 있어서, 더 깊이 알고 싶은 부분은 보충하는 독서가 필수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점이 입문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정성스런 그림이 색다르고 편한 독서 경험을 주지만, 한편으로 독서의 흐름을 끊기도 합니다. 서술과 그림을 서로 잘 맞추기 위해서 편집자가 많은 고생을 한 것이 책에서도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서너 장씩 연달아 나오거나 하면 결국 글의 흐름을 다시 잇기 위해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야 합니다. 건축이라는 주제의 특성상 그림을 보더라도 어차피 인터넷에서 그 대상을 다시 찾아봐야 할 때가 많은데, 그러다보니 교양 수업 판서같은 저자의 정성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1945년 이후로 오면 책이 조금 달리는 느낌이 있고 (그래도 전후 미국 건축에 대한 서술은 매우 재밌었습니다), 특히 세계 곳곳의 현대 건축을 다루는 마지막 장은 아쉬운 구석이 있습니다. 동남아의 토속적 건축과 같이 흥미로운 주제들도 다뤄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느 교과서들의 “세계”를 둘러보는 파트처럼 좀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건축을 다루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책의 큰 줄기와 엇나가는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건축의 사회사》는 유럽 근현대 건축의 역사에 대해 많은 걸 전달해주고, 특히 이들의 흐름을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위치지을 수 있는 지도같은 책입니다. 건축을 전혀 모르는 저같은 사람이 산만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로서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