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일 저녁에 《오디세이》를 보았습니다. 《F1: 더 무비》 이후 1년 만에 영화관엘 갔네요. 제가 도통 영화관에 잘 안 가는지라, 거의 세 시간짜리 영화를 늦은 저녁에 리클라이너에 누워서 보면 행여나 잠들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세 시간 내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다 보고 나니 너무 우울했습니다. 암흑 시대의 입구에 내던져진 이타카인과 같은 마음으로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이것까지도 서구 자유주의적 세계관이 부리는 오만(hubris)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네요.
트로이의 함락, 키클롭스와의 만남, 불손한 구혼자들로 가득 찬 연회장과 같은 장면들이 마치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그림들처럼 검붉은 색을 가득 머금고 묘사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지낸 사구 너머의 맑은 해안이나, 혹시 스코틀랜드 북쪽인가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외딴, 키르케가 사는 작은 절벽섬, 사자(死者)들에게 길을 묻기 위해 왔던 곳의 새파랗게 질린 색감도 기억이 나지만요. 화면이 잘 뽑혀서 영화관에서 안 보면 손해였을 것 같네요.
감정을 빌미로 이익을 보고 전쟁을 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점차 신들로부터 멀어진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흥미롭게 풀어냈습니다. 하지만 환대하지 않는 문명에 대한 묘사에서 무슨 재미를 느끼더라도 결국 현대 윤리-정치에서 느껴지는 우울을 묻어두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에게 너희만 서쪽으로 떠나느냐고 원망스럽게 묻고 싶어지네요. 현명한 인간이자 최고의 지략가에게 아테나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트로이를 보며 심경이 마냥 복잡해졌습니다. 연잎은 치유를 주지만, 도대체 그 대가로 얼마나 많은 망각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 다시는 많은 콜라를 마시며 영화관에 앉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옛날에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볼 때 영화 템포가 느려지는 것 같은 장면을 틈타 화장실을 다녀왔었는데, 나중에 그 짧은 시간 동안 주인공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셨으면 그 장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에게 트로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장면일 수밖에 없어서 《셰이프 오브 워터》처럼 착각하고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되지는 않았네요.
- 톰 홀랜드를 영화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제가 얼마나 영화를 안 보고 사는지 아셨죠?) 그의 텔레마코스를 볼 때마다 되게 키미 안토넬리와 아이작 하자르를 반반씩 한 얼굴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텔레마코스와 매우 어울리는 얼굴을 가진 루키들이지요. (둘 다 데뷔는 작년에 했지만) 집에 돌아가서 유튜브를 보자마자 마주한게 SQ1에서 자갈밭으로 빠지는 안토넬리였습니다….
-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아 페넬로페가 앤 해서웨이였어?’ ‘아 시논이 엘리엇 페이지였구나’ 이러고 있네요.
- 놀란 감독의 영화를 생각보다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참 좋아했던 《다크 나이트》도 있고, 《배트맨 비긴즈》와 《인셉션》, 《인터스텔라》에, 《메멘토》가 있네요. 좋아하는 감독이라는 자각은 없는데, 사실은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원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미뤘네요. 어릴 때 좋아했던 사운드 호라이즌의 앨범 《Moira》1부터, 게임 《하데스》2에 이르기까지 같은 주제와 인물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걸 보는게 참 마음에 듭니다. 사실 제 또래는 흥은영 작가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라고들 하던데, 애석하게도 제가 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오디(god)가 부른 주제가 정도만 대충 알지요. 그리스 신화는 다른 줄글로 된 책으로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이 그러는데, 어릴 때 도서관에 가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빌려오려고 가져왔더니 어머니가 무슨 그런 걸 보냐며 다른 그리스 신화 책을 쥐여주셨다고 합니다 X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