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에 올라온 42O님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책 아홉 권을 꼽는 웹 앱을 발견하고서 저도 한 번 써 봤습니다. 인터넷에서 책 정보를 가져와 아홉 권 이내의 책 목록을 이미지로 만들어 주는 이 앱의 킬러 기능은 책등 이미지를 그럴싸한 책 두께와 함께 붙여서 이미지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책 컬렉션 만들기 웹 앱에서 못 보던 것이라 호기심이 동하더라고요. 이미지를 보니 책등은 예스24에서 가져오는 모양입니다. (물론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들만 올바르게 내어 주는 편입니다)

이 아홉권은 근래에 다 읽은 책들입니다.

아홉 권의 책 이미지: 목록은 이어서 기술됩니다

《독일 철학 개론》은 근대 독일 철학의 역사를 소괄한, 비교적 쉽게 읽히는 독일 철학사 책입니다. 저같은 철학 비전공자가 읽어도 나쁘지 않은 난이도였습니다. 그래도 근대 유럽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으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철학의 ’언어적 전회’에 어느 정도 주목하면서 쓴 것인데, 이렇게 하나의 굵은 줄기가 있다보니 다른 포괄적인 책들에 비해 따라가기가 조금 더 수월했습니다. 물론 현상학에 대해 쓴 9장에서는 거의 혼백이 나가기는 했지요.

《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는 중국의 여성 작가, 논바이너리 작가들의 SF 단편들을 실은 소설집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컨텐츠들을 ‘읽으며’ 즐길 일이 있다보니 그 밑바탕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들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중국 SF를 대표하는 샤자(夏笳)의 단편도 있지만, 저는 그보다는 명말청초의 한 시인을 시간여행 이야기 속에 담가버린 〈우주 끝 레스토랑〉, 가상 육아 컨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진짜 아이를 키우게 된 아빠가 인과응보를 받는 〈아기야, 아기야, 난 널 사랑해〉가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음악 감상을 취미라고 하고 다니면서도 음악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은 전혀 없다보니, 조금은 알고 듣는게 낫지 않나 싶어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을 읽었습니다. 어디선가 추천을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요근래 접한 책들 중에서 가장 몰입해서 읽었네요. 학교 바깥에서 음악을 배우지도 않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보니 본능적으로 음악을 리듬에 이끌려 듣게 되는데, 이 책 덕분에 선율을 듣는 귀를 조금은 튼 것 같습니다. 악기마다 소리를 내는 차이에도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고요. 그래도 복잡한 화음이나 조의 짜임같은 건 여전히 막막하기는 합니다. 알아도 귀가 안 따라주는 것도 있기 마련일까요. 가볍지만 곁에 두고 자주 다시 읽고 싶은 책입니다.

《차별하는 데이터》는 정말 우연히 만난 책입니다. 제가 애청하는 《역사책 읽는 집》 팟캐스트 진행자들이 언급한, 미국의 군사 IT 기업 팔란티어의 핵심 인물들이 쓴 악명높은 책 《기술공화국 선언》을 빌리러 도서관엘 갔는데, 이미 누군가 빌려서 없더라고요. 대신 누군가 반납해서 놓여 있던 이 책을 슬며시 집어올린 것입니다. 아마 도서관 직원분들이 조금 더 부지런했다면 읽을 수 없었겠지요. 이 책과 (결국 읽지는 않았지만, 팟캐스트와 다른 분들의 글에서 그 내용을 지레짐작하자면) 《기술공화국 선언》은 어쩌면 비슷한 사회 배경에서 태어난 완전히 다른 두 책이라고 할 법합니다. 웹 공간을 틀지었고 마침내는 세계를 이 지경으로 이끈 알고리즘의 이데올로기와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인용하는 앞선 책들이 쉽게 빠졌던 환원주의적이거나 수정주의적인 오류들을 피하기 위한 분투들에서 저자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화란 무엇인가》는 제게 언제나 가장 따가운 사상적 죽비를 내리쳐주시는 테리 이글턴 선생이 ’문화’에 대해 짧게 쓴 에세이입니다. 정말 넓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 문화를 헤르더, 에드먼드 버크, 오스카 와일드 등의 인물들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울 삼아 살펴봅니다. 이글턴 특유의 씁쓸한 유머에 더해서 한 페이지 페이지마다 (조금 과장하자면) “다양하면 장땡이냐! 너는 네 옆의 성착취범들도 다양하다고 좋아할 거냐!” “문화전쟁같은 소리하고 있어 아일랜드 작가들은 진짜 혁명하다 죽었어” 같은 (몇 개는 기꺼이 인정하겠으나 몇 개는 좀 피하고 싶은) 불벼락이 내리는 책으로, 읽다보면 제발 그만하시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하지만 실로 그렇습니다. 문화는 강력하고, 현대의 삶을 어느 정도 특징짓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지어져 있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유물론자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성실한 방법이겠지요. 물론 문화가 일종의 국민/국가적 아젠다인 한국에서 문화를 정말 이렇게 다루며 살 수 있을 것인가는 좀 다른 문제겠지만요. 제가 글로 설명하면 뻔하니까 궁금한 분은 꼭 직접 불벼락을 맞아보시길 바라겠습니다 (?)1

《실용주의 프로그래머》는 제가 필요해서 읽은 책입니다. 제목대로 실용적이네요.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으면 좋은 잠언집과 같은 책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책이 제시하는 내용들 중 상당수가 이미 이 책을 읽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중요한 지침으로 자리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원전 격인 (물론 많은 지침들이 이 책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 이 책은 모범적으로 여러 책들과 선구자들, 가령 스몰토크 등을 바르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 ) 이 책을 읽다보면 시대착오적인 장인으로서의 자신을 깨닫게 되고, 반면에 다시 얼마나 여기가 장인을, 아니 도제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를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혹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왜 프로그래머들은 저렇게 (혹은, 저따위로) 생각하는가’가 궁금하시다면, 혹 그 양반들이랑 긴밀히 함께 일해야 할 필요가 있으시다면 읽어봄직한 책입니다.

일본, 몽골, 타이완 등에서 한국전쟁 근처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책 《감춰진 역사, 아시아의 한국전쟁》과, 한 미국 언론인의 글쓰기 지침서 《글쓰기 생각쓰기》, 그리고 서양 근대 건축사를 정치경제학적 시선에서 일관되게 바라본 《건축의 사회사》는 제가 이미 이 블로그에 감상문을 올려놓았습니다. 또 근래에 읽었지만 이 아홉 권에 굳이 담지 않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상희의 《인류의 진화》, 이매뉴얼 쉬의 《근현대중국사》 상하권 등입니다)

다음은 앞으로 읽을, 읽고 싶은, 혹은 읽다 말고 잠깐 치워놓은 아홉 권의 책들입니다. 아직 읽지 않았으니 길게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없네요. 여기에도 역시 이 아홉 권으로 꼽지 않았지만 이미 건드린 책들이 있습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립 드와이어 등의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제니퍼 티드웰의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UX/UI의 비밀》 등입니다). 이 중에 한두 권만 마저 읽어도 올해는 독서 대성공이겠네요.

다른 아홉 권의 책 이미지: 목록은 이어서 기술됩니다

각주

  1. 테리 이글턴은 2024년에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겨울 강연에서 문화를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그의 문화에 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Where does culture come from?” 유튜브 영상, LRB 게시글 ↩